작성일
2021.12.06
수정일
2021.12.06
작성자
유인권
조회수
336

부산일보 '유인권의 핵인싸' 2021년 11월 24일자 "미래를 꿈꾸는 법"

[유인권의 핵인싸] 미래를 꿈꾸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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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가 어느새 중견이다. 시간에도 속도가 있다. 물리학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난주에 수능을 치르고 대학입시에 아직도 여념이 없는 수험생들에게 지난 6년은 까마득한 인고의 시간이었겠지만, 어느덧 내게는 ‘어느새 벌써 6년’의 느낌이다. 같은 시간이라도 나이가 들수록 심장 박동수가 줄어들어 나이가 어렸을 때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순식간’(瞬息間, 눈 깜짝, 숨 한번 쉬는 사이)이라는 말 그대로 나이가 들면 생체리듬 자체가 느려지는 까닭에 ‘순식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미래를 꿈꾼다는 생각을 하면 사실 너무 멀어서 실감하기가 어려운 것 같지만,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면 금방일 듯도 하다. 갈수록 빨라지는 시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기초과학은 수십 년의 긴 호흡 필수적

열악한 국내 환경 탓 연구 전념 못 해

앞선 성과 축적·발전하는 시스템 절실


30년 전, ‘87년 민주화운동’에도 불구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나간 지구의 반대편, 거기에는 몇십 년 앞의 미래가 있었다. 먼 이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에게까지 돈 한 푼 받지 않았던 대학과 병원, 카트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다시 튀어나오던 동전, 튼튼하고도 예쁘게 조립할 수 있었던 가구들, 맛있어 보이던 애완동물용 음식들, ‘셀프’ 주유하던 주유소, 굳이 창구에 가지 않아도 간단한 거래를 할 수 있었던 자동 인출기, 생각하지도 못했던 온갖 편의 시설과 복지를 그렇게 처음 경험했다. 대학에 들어가기는 쉬워도 졸업하기가 어렵고, 출신 대학과 취업은 상관이 없었으며, 임차인보다 임대인이 더 골치 아파하고, 시내에는 공공버스만 들어오게 하자는 찬반 여부를 시민들에게 묻던 나라, 그렇게 난 조국의 미래를 꿈꿨다.

앞서가는 나라의 기초과학자들은 평생 수십 년간 하나의 실험만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30여 년을 한 호흡으로 가는 거대 기초과학 실험들은 개념부터 연구·개발·제작·설치가 이루어지는 준비 기간 10여 년, 데이터를 받아 가며 정기적인 유지·보수·업데이트로 실제 실험을 수행하는 실험 기간 10여 년, 실험 기간 동안 지속적인 분석을 통해 얻은 퍼즐 조각 결론들을 종합하여 실험의 종지부를 찍기까지의 분석 기간 10여 년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국제 공동 연구자가 함께 일한다. 실험을 최초로 고안한 석학과 리더 그룹도 있지만, 어느 연구그룹에 속해서 그 중간 어디쯤에서 역할을 감당하며 학위를 받은 학생들도 존재한다. 석학에서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파벳순으로 저자가 되며, 논문은 반드시 전체 이름으로 출판된다. 수백, 수천 개의 정밀한 톱니바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거대한 장치를 이루는 것처럼, 각자의 역할로 거대 기초과학 연구를 십시일반 감당해 내고 있는 것이다.

10여 년 만에 돌아온 우리나라에서, 맨바닥에 앉아 20년 그림을 그렸다. 딱히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거대 기초과학의 주기가 그만큼 긴 까닭이었다. 하나의 실험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학생들과 실험실을 꾸미고 국제 공동 연구에 동등하게 기여할 만한 연구그룹을 만들어야 하는데, 불과 몇 년 안에 주도적인 논문을 써 승진도 해야 하고, 이 실적을 바탕으로 연구비도 경쟁적으로 따내야 했기 때문이다. 논문이나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검증도 없이, 수십 년의 긴 호흡으로 실험 하나의 계획을 세우는 초짜 연구자에게 승진이나 연구비를 약속할 학교나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박사 과정 동안 참여했던 데이터의 분석 단계에 있는 실험을 통해 논문을 쓰고, 실제 진행 중인 실험에 새롭게 참여해 학생들이 실제 실험을 경험하게 하고, 준비 단계에 있는 실험에 들어가 검출기를 연구 개발하며 실험실을 구축하는 삼중 플레이를 해야 했다. 외국 친구들은 모두 내게 미쳤다고 했다. 열악하게 각자도생하고 있는 국내 연구자들과 연구 모임을 만들고, 끝장 토론과 협력 연구를 일궜다. 그렇게 20년이 훅 갔다.

핵심은, 이것이 얼마나 잘 축적되느냐의 문제다. 후임이 와서 같은 고생을 반복하지 말고, 이미 일궈 놓은 토대에서 새로운 것을 쌓아 가는 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이것이 말 잘 듣는 후임을 뽑는 ‘갑질’이 돼 전임이 퇴임하기 무섭게 앞사람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 꿈은커녕 영원히 과거에만 머무는 사회가 된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작동하게 할 것, 이것이 미래를 꿈꾸는 법이다.

지난달 21일 우주로 향했던 누리호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30년 동안 쌓은 꿈이었다. 선진국에서 기초과학의 연구력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명문대나 몇 명의 스타 과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거대 실험 시스템에 기반한 국립연구소다. 현재 추진 중인 학회를 통해 국립연구소 건립을 꿈꾸는 이유다. 지난 20년과 똑같은 그림으로는 어림없다. 아무리 작은 것도 쌓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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